제 3단계 : 중공군 침공 / 재 반격 (1950. 11. 25 ~ 1951. 6. 23)
- 중공군은 항미원조(抗美援朝)라는 명분하에 1950년 압록강을 넘어 북한 지역에 진입
- 중공군은 작전을 3단계화하여 1차 공세시는 유엔군의 국경진출을 저지, 2차공세로 38도선까지 진출, 3차 공세로 서울을 재점령 후 차후 작전을 준비한다는 목표를 세움
- 10월 하순에 중공군 제13병단 예하 6개군 18개 사단과 11월 중순 에는 제9병단 예하의 12개 사단이 북한으로 추가 잠입
- 중공군과 북한군은 12월하순 38도선 전개 및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자 한국군과 유엔군이 1월 25일 일제히 반격작전 개시
- 3월 15일 1·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 재탈환 및 3월말 38도선 회복 하고 철원-금화로 진격함
-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구파발-홍천-강릉선까지 진출하자 유엔군은 3차 반격작전으로 5월말 38도선 회복 및 문산-연천-김화-간성 점령
1950. 10. 25 ~ 1951. 01. 24중공군 개입과 1.4 후퇴
- 압록강 얼음위를 걸으면서 북한지역으로 이동하는 중공군 (1950. 10. 14)
-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의해 철수하면서 쉬고 있는 미 해병 제1사단 (1950. 11. 29)
- 중공군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즐거워하는 모습 (서울 중앙청)
- UN군이 평양, 함흥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던 무렵이 1950년 10월 19일 경부터 중공군은 은밀하게 압록강을 넘어오기 시작했다. 중공군 제 4야전군은 서부지역에서 1950년 10월 25일 화천지역의 국군에 대해 공격을 실시하였고, 제 3야전군은 동부지역에서 사상 유례없는 인해전술로 UN군을 공격해왔다. 이에 UN군은 12월 4일에 는 평양을 내주고, 12월 14일에는 흥남철수작전을 전개하였으며, 12월 31일 38도선을 경유,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포기, 전략적 후퇴를 해야만 했다.
1951. 01. 25 ~ 1951. 06. 23재반격 및 서울 재탈환
- 북으로 공격하기 위해 도하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는 군용차량 (1951. 3월)
- 한강 넘어 서울방향으로 포사격을 하고 있는 유엔군 (1951. 4월)
-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던 아군은 1951년 1월 오산-제천-삼척을 연결하는 선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고, 1월 25일 대반격을 개시하여 서부전선의 미 제 1군단은 2월 10일 인천-김포를 거쳐 예하의 국군 제 1시단이 3월 15일 수도 서울에 입성하였다.
중부전선의 미 제 9군단은 3월 15일 홍천을, 동부전선의 국군 제 1군단은 3월 27일 양양으로 진출하였으며, 3월말에는 현재의 휴전선을 형성하여,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