일본의 패망 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, 얄타 등에서 이루어진 국제적 합의가 있었으나,
[미·소 군정에 의해 38도선을 기준으로 잠정분단] 되었다.
국제적 합의
- 카이로 회담(1943.11)
- 얄타 회담(1945.02)
- 모스크바 회담(1945.12)
-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주도권을 잡은 연합국들은 일본이 강점한 영토의 처리과정에서 한반도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시작
- 1943년11월 미·영·중 3국 수뇌가 참가한 카이로 회담에서 「한국 국민의 일본 예속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적절한 과정을 거쳐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도록 한다」라고 선언
- 1945년 2월 미·영·중 3국 수뇌가 참가한 얄타회담에서 「일정기간 미·영·소·중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독립을 보장한다」라고 잠정합의
- 1945년 12월 미·영·소 3국 외상이 참가한 모스크바 회담에서 「미·영·소·중 4개국이 신탁통치로 한국독립을 준비하고 미·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남북문제를 조정한다」고 결의
소련의 북한 진주로38도선 설정
- 소련군 입성 환영대회 (1945.8.30 평양)
- 소련군 입성 환영대회(1945.8.30 평양)
- 서울 광장에서 미군을 환영하는 시민들 (1945.9.9)
- 일본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8일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 후 한반도로 진출하기 시작하여, 8월 22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고, 8월말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여 군정 실시
- 1945년 8월 15일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방지하기 위하여 「38도선을 미·소 양국군 진출 한계선으로 한다」 는 전문을 연합국에 타전하였고, 소련의 묵시적인 동의하에 한반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
- 미국은 소련군이 북한지역을 장악한 한달 뒤인 1945년 9월 4일에 남한에 진주하였고, 9월 7일에는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군정을 선포
민족 통합에 의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고
한반도에 2개의 정부가 출범되어 민족의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.
통일정부 수립을 위한미국의 노력
- 덕수궁에서 열린 미ㆍ소 공동위원회 (1946.3.20)
- 1946년 3월 제1차 미·소공동위원회의 개최 후 24차에 걸친 회의를 실시했으나, 미 군정은 남북통합을 주장하고 소 군정은 분할 상태에서 협동을 주장함으로써 회담 결렬
- 1947년 8월 미국이 모스크바회담 결의사항 실천여부 결정을 미ㆍ영ㆍ소 4개국 회담을 제의했으나 소련의 거부로 좌절
두개의 이념,두개의 정부수립
-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(1948.8.15)
-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경축 군중대회 (1946.3.20)
- 1947년 11월 14일 UN총회에서 「UN 감시하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모든 외국군은 철수한다」 는 UN결의안을 가결하였으나 소련은 UN의 결정에 승복할 수 없다고 선언
- UN의 결의에 따라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설치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나, 소련의 비협조로 북한지역 출입이 금지되어 남한에서만 활동
-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UN감시하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,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
- 1948년 5월 북한은 조선헌법을 선포하고,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범